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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공연

피나 바우쉬의 무대에서 냄새 입자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양자적 시선으로 읽는 <카네이션>, 그리고 그 유산의 무게

by 스티븐C 2025. 6. 16.

퀀텀 물리학이 말하듯,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측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은 바로 그 물리법칙을 감정과 몸짓으로 구현해낸 무대다.
무용수는 감정의 입자처럼 움직이고, 무대는 냄새와 기억의 파동으로 진동한다.
이 글은 다가오는 2025년 LG아트센터 공연을 앞두고, 피나 바우쉬의 시노그래피를 ‘양자적 시선’으로 다시 읽는다.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부퍼탈 탄츠테아터 'Nelken' by Pina Bausch, Tanztheater Wuppertal Pina Bausch + Terrain Boris Charmatz 2025.11.06 ~ 2025.11.09 LG SIGNATURE 홀 [출처]https://www.lgart.com/product/ko/performance/252888

📘 프롤로그

입자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으로 진동한다.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정된 움직임은 없으며, 무용수는 ‘형태’를 보여주기보다는 감정의 입자로서 ‘확률적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2025년 11월, LG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는 <카네이션>(Carnations)은, 바우쉬의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담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가느다란 파동 위에 존재하는지를 증명하는 퀀텀적 시노그래피의 장이다.

1장_피나 바우쉬, 무대를 입자로 바꾼 사람

흥미롭게도 본 공연에는 저먼 셰퍼드 4마리가 실제로 등장한다. 일부 장면에서는 무대 뒤편에서 짖거나 관객을 응시하는 이 개들의 존재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인간 중심의 무대 규범을 해체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이들은 무용수들과 협업하지 않는다. 대신, 예측 불가능한 생명체로서 무대의 ‘무정형성’을 확장시킨다.

무대 위에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 시선, 움직임이 얽히는 그 순간, 우리는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예술의 통제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무대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인가?

피나 바우쉬는 무용수가 아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감정의 진동’을 다루는 예술가였다. 탄츠테아터(Tanztheater), 즉 ‘춤추는 연극’은 움직임이 이야기를 말하지 않더라도 감정의 진폭으로 관객의 내면을 진동시키는 무대를 가능하게 했다.

<카네이션>은 피나 바우쉬의 대표작 중 하나다. 꽃과 흙, 하이힐과 수트, 그리고 남녀 무용수들의 반복되는 몸짓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형식이 없기에 더욱 깊은 감정의 입자들을 허공에 흩뿌린다.

2장_ 냄새 입자, 기억을 흔드는 무형의 파동

무대의 공기는 무형이지만, 때론 가장 확실한 물질이었다. 《카네이션》을 기억하는 나에게 그 무대는 시각적 이미지보다 먼저, 후각의 진동으로 다가온다. 흩뿌려진 꽃잎과 짓밟힌 흙, 자유로운 젊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냄새 입자’의 파동을 공기 중에 남겼다.

이 작품에서 가장 canonical한 입자는 냄새였다. 피나 바우쉬는 무대 위에 장미를 뿌린 것이 아니라, 감정이 녹아든 공기를 연출한 것이다. 냄새는 파동보다 오래 지속되고, 의미보다 빠르게 인식된다. 무대는 그 냄새로 관객의 감각에 흔적을 남겼다.

3장_ 무대 위 파동: 반복과 감정의 간섭무늬

<카네이션>의 가장 큰 미학은 반복이다. 피나 바우쉬는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게 함으로써, 동작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안에 감정의 미세한 변화들을 입힌다. 이는 마치 파동 간섭무늬처럼, 겹쳐지고 흔들리며 감정의 진폭을 증식시킨다.

한 여성 무용수가 흙 위를 걸으며 꽃잎을 쓸어담고, 다시 흩뿌리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네 번, 다섯 번 반복되지만 그 감정은 절대 같지 않다. 각 반복은 새로운 시간의 진입이며, 각 동작은 이전 감정의 잔향에 물든 또 다른 가능성의 현실이 된다. 이는 곧 양자역학의 '중첩 상태(superposition)'와 연결된다.

무용수는 존재하지 않은 듯 머물다가, 어느 순간 확실한 동작으로 ‘입자화’된다. 그것은 정지된 포즈가 아니라, 정서가 붕괴되거나 응축되는 한 지점의 확률로서 존재한다. 감정은 서사가 아니라 파동으로 전달되며, 관객의 내면을 간섭하며 흔드는 진동으로 전이된다.

피나 바우쉬의 무대 카네이션
[출처]https://www.goethe.de/ins/ca/en/kul/kue/nel.html

4장_무대는 관측될 때마다 달라진다 — '관측자 효과'와 시선의 물리학

무대 위 현실은 객관적이지 않다. 누가 어디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무대는 전혀 다른 감정장을 생성한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자 효과'는, 관찰하는 존재의 개입이 실재의 성질을 바꿔놓는다는 개념이다. <카네이션>에서 관객의 감정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무대 위 현실을 생성해내는 주요 변수다.

예컨대, 한 장면에서 한 남성이 꽃밭을 뛰어다니며 웃는 장면은 어떤 관객에게는 슬픔의 탈주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이에게는 유년의 회귀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때 무대는 더 이상 '하나의 의미'가 아닌, 관객의 마음 속에서 측정되어 구체화되는 감정의 필드가 된다. 그것은 정해지지 않은 입자이자, 해석될 때만 존재하는 무형의 현실이다.

<카네이션>의 시노그래피는 그래서 명확한 공간 디자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관객의 시선과 정서가 입자화된 무대 요소들과 간섭하여 만들어내는 공동 진동장에 가깝다.

5장_시간의 중첩 — 2000년의 무대와 2025년의 무대가 겹쳐질 때

《카네이션》은 한국 관객에게도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00년, LG아트센터 개관을 기념해 초청된 이 공연은 당시 한국 무대예술계에 충격을 던졌다. 관객은 처음으로 이야기 없는 연극, 서사 없는 무용, 감정만이 진동하는 공간을 마주했다.

그리고 2025년, 같은 무대에서 같은 작품이 다시 오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재공연이 아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중첩되어 생성되는 새로운 현실이다. 이것은 마치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중첩 상태’와 다르지 않다.

2000년에 이 공연을 봤던 나는 이제 2025년의 나로서 다시 그 무대를 마주할 것이다. 동일한 무용수는 없고, 같은 시선도 없지만, 그 무대 위의 카네이션은 과거의 진동과 현재의 감각을 동시적으로 포함한 채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억이 현재의 감정 구조에 얼마나 깊게 간섭하는지를 무대 위에서 입증한다.

이 무대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관객의 내면에 존재하는 시간의 파동이 현재라는 장소에서 공명하는 장면이다. 바우쉬는 이 공연을 통해 기억이라는 입자마저 시노그래피의 일부로 만들었다.

6장_에필로그 — 우리는 모두 파동 위에 서 있다

피나 바우쉬는 이 작품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대에서 설명보다 더 깊은 확률적 감정을 경험한다.

《카네이션》은 무대 위에 놓인 하나의 입자다. 그 입자는 우리가 바라보는 순간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 안의 기억, 상처, 기대, 애도… 모든 것이 그 무대를 통해 한순간 ‘움직이는 파동’이 된다.

우리는 모두 파동 위에 서 있다. 그 진동은 무대 위에서, 그리고 관객석에서 계속된다.

Nelken&quot; by Pina Bausch
Performance of "Nelken" by Pina Bausch at the Tanztheater Wuppertal photographed by Ursula Kaufmann [출처]https://www.goethe.de/ins/ca/en/kul/kue/ne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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