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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공연

퀀텀이 《오셀로》를 무너뜨리는 방식: 빈 무대, 그의 감정은 어떻게 피아노로 연주되었나

by 스티븐C 2025. 6. 15.

퀀텀(양자역학)은 말한다. 현실은 우리가 보는 순간 생성된다고. 그렇다면 무대 위 현실 역시, 관객의 시선 속에서 파동처럼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루크 페르세발의 《오셀로》(2008, SPAF서울국제공연제)는 그 질문에 연극적 방식으로 응답한다. 단 하나의 피아노, 거의 멈춰 있는 시간, 그리고 침묵 속의 대사들. 이 공연은 고전 셰익스피어를 해체하는 동시에, 무대라는 양자적 공간을 열어젖힌다. 이 글은 시노그래퍼의 시선으로, 그 무형의 파동을 기록한 탐사 보고서다.

루크 페르세발의 《오셀로》
Jazzzeitung 2003/07: berichte, „Othello“ mit Jens Thomas in den Münchner Kammerspielen[출처]Andreas Pohlmann/Kammerspiele München _https://www.jazzzeitung.de/jazz/2003/07/berichte-muenchen.shtml

+ 서문

“이것은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셰익스피어다운 오셀로였다.”

2008년, 서울 토월극장에서 공연된 《오셀로》는 관객의 기억 속에 아주 낯설고도 기묘한 고전 비극으로 남는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그대로 있었지만, 그 언어는 찢기고 늦춰지고 끊겼다. 대사는 천천히, 때론 숨이 막힐 만큼 느린 호흡으로 이어졌고, 무대는 그 어떤 장식도 없이 거의 공허에 가까웠다. 배우들은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무대 위를 배회했고, 공간엔 단 하나의 피아노만이 관객과 배우 사이의 고요한 긴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연출은 루크 페르세발 (Luk Perceval, 1957~ ).

루크 페르세발은 벨기에 태생의 연출가로, 유럽 연극계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철학적인 무대 언어를 구사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벨기에 플랑드르 연극극단(Toneelhuis)의 예술감독을 거쳐 독일 함부르크 타알리아 극장, 뮌헨 캄머슈필레 등에서 활동하며, 고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연출은 종종 “무대 위 존재론”이라 불릴 만큼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루크 페르세발은 이 공연을 통해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다. 그리고 시노그래피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공연을 통해 ‘비어 있음’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 빈 무대의 충만함

시노그래피 관점에서 본 미니멀리즘과 공간 감각

무대 위에는 어떤 장치도 없었다. 벽지도, 가구도, 조명장치도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오직 어둠, 차가운 회색 벽, 그리고 무대 중앙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하나.

무대는 하나의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오셀로의 **정신적 풍경(psychological landscape)**이라 말할 수 있겠다. 관객은 더 이상 오셀로의 배경 베니스키프로스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오셀로의 마음 안에 들어가 있었고, 그 마음은 점점 붕괴되고 있었다.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을 때조차 무대의 중력처럼 존재했다. 그것은 상징이었다. 욕망, 불안, 질투, 침묵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단 하나의 오브제였다.

조명은 거의 ‘죽음의 빛’에 가까웠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어둠 또한 '무(無)'가 아닌 하나의 물질적 상태다. 이 없을 때조차 공간은 진동하며, 파동과 입자는 공존한다. 이 무대 위 어둠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입자들이 아직 응축되지 않은 상태로 떠도는 '전(前)현실'의 장처럼 보였다. 냉랭한 톤, 어깨 위에 내려앉는 듯한 그림자. 페르세발은 빛을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도구로 사용했다. 배우들의 표정은 또렷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불안을 자극했다. 관객은 공간의 공허함 속에서 인물의 붕괴를 ‘느끼게’ 되었고, 시각적 미장센은 도리어 극도의 내면화를 유도했다.

루크 페르세발의 《오셀로》
루크 페르세발 (Luk Perceval)의 오셀로 [출처]http://spaf.or.kr/2024/spaf/past.php

+ 인터루드: 양자무대와 존재의 파동

“우리가 무대 위에 보는 것은 실제인가? 아니면, 관찰하는 우리가 그 순간 만들어내는 현실인가?”

루크 페르세발의 《오셀로》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질문이었다. 그의 무대는 완결된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생성되는 감정의 장이었다. 이는 다시 양자학에서 이야기하는 “관측이 현실을 만든다”는 개념과도 닮아 있었다.

말하자면 어둠의 입자‘파동’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측되는 순간 비로소 **입자(현실)**로 고정된다. 이 공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라는 고전 텍스트는 ‘잠재성의 파동’으로 존재하고, 관객이 집중하고 감정이 진동하는 순간—무대 위 현실로 응축된다. 다시 말해, 페르세발의 오셀로는 고정된 서사가 아니라 관객과 무대 사이에서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양자적 장면들의 연속인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는 단지 오브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파동의 중심점이었다. 거기서 질투가, 침묵이, 그리고 말해지지 않는 진실이 파동처럼 번졌다. 이 공연의 무대는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마치 평행우주처럼 여러 가능성의 층위들이 겹쳐지는 공간이었다. 이아고는 단지 한 인물이 아니라, 오셀로 내면 속 수많은 ‘가능한 나’의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시노그래피 또한 어쩌면 양자적 예술이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갖고 무대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은 완전히 다른 장면을 생성한다. 페르세발의 무대는 그렇게 무대를 지우면서, 무대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 느림과 침묵의 정치학

페르세발이 설계한 리듬과 시간의 변주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속도감 있는 전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페르세발의 오셀로는 정반대였다. 이 공연은 시간의 흐름을 거의 중단시킨다.
대사 하나가 끝나는 데 몇 분이 걸릴 수도 있고, 배우가 침묵한 채 무대에 서 있는 시간은 도리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느림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다. ‘질투’라는 감정은 폭발하지 않는다. 서서히 침식되며 자신을 갉아먹는다. 페르세발은 이 심리적 병리학을 무대의 리듬으로 번역해낸다. 시간은 더 이상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서 퍼져 나오는 감정의 웅덩이와 같다.

또한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다. 이 침묵은 '말의 실패' 이후에 남는 공간이며, 언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때 인간이 마주하는 절망 그 자체다. 데스데모나는 이러한 침묵의 정점에 있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오셀로의 질투보다 더 거세게 무대를 점유한다.

셰익스피어《오셀로》이미지
Othello (The Annotated Shakespeare) by Shakespeare William [책표지이미지_ 출처]https://www.amazon.com/Othello-Annotated-Shakespeare-2005-11-01-Paperback/dp/B012YT553Q

+ 인간은 왜 무너지는가

오셀로와 이아고, 그리고 데스데모나의 존재론적 전환

페르세발은 인물들을 심리적 구조로 해체한다.

  • 오셀로는 흑인으로서의 외부 타자라기보다는, 자기 내부의 타자를 이기지 못하는 존재로 재해석된다.
  •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의심하고, 그 의심이 곧 파괴로 이어지는 회로에 갇힌다.

이아고는 고전적 악당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증오의 ‘공명판’**처럼 기능한다. 그는 단순히 ‘’이 아니라, 오셀로의 내면 속 약점을 들춰내는 반사체이다. 이아고는 외부에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오셀로 내부의 그림자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이 공연의 이아고는 거의 오셀로의 분열된 자아처럼 느껴진다.

데스데모나는 절대적으로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지만, 극의 윤리적 중심이자 ‘침묵 속의 저항’을 상징한다. 그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모든 남성들을 고요하게 심판한다. 이 공연에서 데스데모나는 비극의 희생자가 아니라, 진실을 끝까지 지키는 존재의 형상이다.

+ 후기

이 공연은 연극인가, 사유의 도구인가?

시노그래퍼로서 이 공연이 던진 질문

《오셀로》라는 고전 비극을 통해 루크 페르세발이 보여준 것은 '극의 재현'이 아니라, 극의 해체와 사유의 재조립이다. 무대는 더 이상 이야기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었다. 인간은 왜 질투하는가?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오해하고, 어디까지 파괴하는가?

시노그래퍼로서 이 공연을 보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비워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공간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감정의 진동판이며, 때론 한 대의 피아노와 어두운 조명만으로도 무한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

페르세발의 《오셀로》는 우리에게 연극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줬다. 그것은 시각적이면서도 철학적이고, 침묵하면서도 가장 강하게 말하는 예술. 이 공연은 단지 다시 보고 싶은 연극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야 할 어떤 질문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glkY5H2c1k

SPAFinSeoul [출처]http://spaf.or.kr/2024/spaf/past.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