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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공연

러브바밍과 나르시시즘 ― 자아가 자아를 포위할 때”

by 스티븐C의 VIBES 2025. 6. 14.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를 두던 시대의 여파일까? 모바일의 일상화 때문일까?
대략 85~110cm² 정도의 면적에 우리는 너무나도 몰입되어, 서로의 방향이 충돌되고 있다. 지하철, 건널목, 보행로…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그렇게 도취되어 있을까? **‘스몸비’(스마트폰+좀비)**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들과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닐까?

요즘은 **‘러브바밍(love-bombing)’**이라는 말도 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융단폭격을 퍼붓는 말과 행동을 말하는데, 아마도 우리는 모두 그러한 스마트폰에 러브바밍을 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인지도 모르겠다.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물론 그 원형인 **나르시시즘(自己愛, Narcissism)**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상화된 자신에 대한 자기애적 왜곡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빠져드는 몰입은, 단순히 물 위에 비친 자기상이라기보다는, '거울'과 '이미지', '욕망', 그리고 '타자의 시선'이 얽힌 과도한 침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주제를 감각적으로 구현한 연극이 있었다. 디지털 무대와 프로젝션 기술을 통해 '자기 이미지'를 해체하고 시각화한 연극 — 바로 **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1957~     ) 의 『안데르센 프로젝트』**다. 로베르 르파주(캐나다)는 현대 공연예술의 경계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연출가이자 배우, 극작가,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다.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미지
The Andersen Project [출처]https://exmachinalepage.blogspot.com/2008/10/andersen-project-2005.html

+《안데르센 프로젝트: The Andersen Project 》 줄거리

덴마크 정부의 의뢰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고전 동화와 현대 인간의 내면을 교차시킨다. 무대 위에는 단 한 명의 배우12개의 인물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시대와 정체성,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다.

주인공은 캐나다 출신의 프랑스어 극작가. 그는 안데르센 동화를 어린이 오페라로 각색하기 위해 파리로 온다. 파리의 낯선 도시, 언어의 경계, 상업적 예술계의 냉담함 속에서 그는 점차 고립되고,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한다.

이 극은 동화 *〈그림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안데르센의 주인공처럼, 이 남성도 결국 자기 ‘그림자’에 잠식된다. 즉, 그는 외부의 타자(세상)와 내면의 자아(그림자)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간다. 이 그림자는 그를 지켜주는 존재이자, 그를 파멸로 끌고 가는 또 다른 자아다.

+ 주제와 오늘의 시의성 — #나르시시즘

안데르센 프로젝트》는 SNS 시대의 자아 분열, 피로한 자의식, 과잉노출된 자기 이미지 속에서 흔들리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파리에 도착한 주인공이 직면하는 불안, 고립,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 디지털 공간 속 ‘좋아요’에 중독된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꾸미고, 연출하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지 못하고, 언제나 ‘그림자’ - 즉 이미지화된 자아 - 와 대면한다. 이 극은 바로 그 나르시시즘의 덫을 형이상학적·시노그래픽 방식으로 풀어낸다.

 

안데르센프로젝트:[출처]https://www.epidemic.net/en/art/lepage/index.html

+ AIDA 분석 (Attention–Interest–Desire–Action)

 

🅐 Attention – 몰입의 사회, 몰락의 자아

파리의 지하철 벽, 낙서처럼 스친 단어 하나. 그렇게 시작된 『안데르센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가 빠져 있는 자아의 미로를 파고든다. 르파주는 단 한 명의 배우를 통해 12개의 인물, 12개의 감정, 그리고 12개의 ‘나’를 펼쳐낸다. 기술적으로는 프로젝션 맵핑과 디지털 무대를 활용하고, 정서적으로는 인간 내면의 층위를 켜켜이 펼쳐 보인다. 이 연극은 무대 위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관객 자신의 이야기이다. 무대와 현실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관객은 ‘저건 나야’라고 속삭이게 된다. 나르시시즘은 단지 심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오늘날의 도시적 체험 그 자체다. 길 위의 몰입된 자아들이 무대 위에 올라, 그림자처럼 우리를 비춘다.


🅘 Interest – 그림자와 타자의 시선

『안데르센 프로젝트』의 서사는 안데르센의 동화 〈그림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동화에서,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결국 그 그림자에게 정체성을 빼앗긴다. 이 설정은 더 이상 동화 속 상상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가 만든 이미지’ — SNS 속 필터링된 자아, 연출된 일상, 꾸며진 감정 — 에게 점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르파주는 무대 위에서 그 그림자를 육화시킨다. 주인공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캐나다 작가로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지만, 타자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간다. 이 과정은 단지 정체성의 혼란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아가 쪼개지고 왜곡되는 경험이다. 그 시선은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균열을 낳는다.


🅓 Desire – 무대에서 만나는 나의 얼굴

우리 모두는 어딘가 ‘잘 보이기 위해’ 존재한다.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모든 행위는 사실상 타인의 눈을 통해 나를 구성하려는 몸부림이다. 『안데르센 프로젝트』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극 중 주인공은 안데르센의 동화를 오페라로 각색하는 일을 맡으면서도, 자기 안의 공허함 외로움에 직면한다. 예술적 명성과 창작의 고통 사이에서, 그는 자기 이미지를 되돌아보다가, 마침내 그 이미지에 잠식되어 버린다. 우리는 스크린과 거울 사이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재현한다. 그 재현이 때로는 존재보다 더 실감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누구일까? 르파주는 그 질문을 던지며, 관객이 자신의 그림자와 직접 대면하게 만든다. 이 연극은 바로, 관객의 욕망과 불안을 조용히 건드리는 은유다.


🅐 Action –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질문

안데르센 프로젝트』를 본다는 것은, 단지 무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문을 여는 일이다. 나르시시즘은 심리학적 진단 이전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건이다. 과잉된 이미지 생산, 피로한 타자 의식, 끝없는 비교와 보정.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마치 하나의 연출된 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르파주는 말한다 — ‘너는 누구인가, 너를 본 그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개인적이면서도 구조적인 반성으로 이어진다. 현대 사회의 불안과 연결된 자아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예술의 힘. 《시노그래피 카페》에서는 이와 같은 연극을 통해, 우리가 잠시 멈추어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탐색할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그림자와 함께 살고 있는가?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미지
The Andersen Project[출처]https://kalafudra.com/2009/05/20/the-andersen-project/

🎬 마무리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편집한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편집’이 타인의 눈을 통해 구성된 왜곡된 나일 때다. 내가 선택한 아이템, 쓰는 말투, 선택한 표정 하나하나가 결국 타자의 시선이라는 무대에서 연출된 장면이라면, 그 안의 나는 어디까지 진짜일 수 있을까. 로베르 르파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는 그 질문을 우리 앞에 내려놓는다.

이 연극은 이러한 주제로, 연출된 자아와 이미지 중독 사회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자아는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재현되고 소비되는 콘텐츠이며, 무대 위에서도 일상에서도 타인의 반응 속에서 존재하는 불안정한 형상이다.

이건 단지 연극 무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걸어다니는 길 위, 지하철 안,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도 ‘연출된 자아’와 ‘진짜 나’ 사이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보다, ‘반복 가능한 이미지’로 남고자 한다. 유명한 표정, 짧은 말, 짧은 영상 하나가 복제되고 퍼지며, 자기 자신은 어느새 하나의 **(meme)**으로 압축된다. 나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기억되는 방식만 남는다. 이것이 나르시시즘의 대중적 버전이고, 이 시대의 ‘그림자’다.

‘잘 보이기 위한 나’로 사는 데 지쳤을 때, 예술은 작은 문을 연다. 거울을 들여다보듯 무대 위 한 장면을 통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나인가?” 그 물음이 시작되는 순간, 조금씩 **‘되돌아오는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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