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장티의 공연을 본 이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해는 안 됐는데, 눈물이 났다." 그의 작품은 줄거리보다는 감정의 지도, 시간보다는 무의식의 구조, 말보다는 이미지로 구축된다. 그 세계 안에서 관객은 해설을 듣는 대신, 기억을 꺼내 보게 된다.
+ 장티의 작품은 줄거리가 없다?
이번 장에서는 장티의 대표작 세 편:
- 《Dérives》( 1989-1993 )
- 《Ne m’oublie pas》(2004)
- 《Voyageur immobile》(1995)
을 중심으로, 그의 시노그래피적 기법과 감정의 극장으로서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Dérives》- 표류하는 기억, 감정의 바다
"우리 모두는 기억 속에서 표류한다. 방향도 없이, 해변도 없이."
《Dérives》는 '흘러내림', '표류'라는 뜻처럼, 하나의 확실한 방향이나 결말 없이 전개된다. 이 작품은 트라우마, 상실, 유년의 기억이 천처럼, 그림자처럼 무대를 떠다니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천이 천천히 내려오고, 배우는 그 속으로 사라진다.
- 배우들은 마치 유령처럼 무대를 떠돌며, 때론 자신과 닮은 인형과 마주한다.
- 종종 무대는 회전하거나 벽이 움직이며,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문다.
시노그래피 핵심:
- 천 → 기억의 물성, 감정의 막
- 움직이는 벽 →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
- 반복되는 몸짓 → 상처의 재연
관객은 이 무대를 보며 자신의 오래된 감정, 잊고 있던 상실, 깊은 내면의 흐름에 접속하게 된다.
+《Ne m’oublie pas》- 잊혀짐에 대한 저항
"당신은 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나는 스스로를 잊고 있나요?"
《Ne m’oublie pas》(나를 잊지 마세요)는 장티의 대표작 중 가장 감정적이며 서정적인 작품이다. 무대 위에는 종이 인형, 천 조각, 그림자와 배우가 겹쳐지며, 하나의 존재가 수없이 분열되었다가 재조립된다.
- 배우는 종이처럼 얇은 옷을 입고 등장하고, 그 종이는 자아의 껍질처럼 벗겨진다.
- 종이 인형은 배우의 과거, 혹은 잊힌 자아를 상징하며 끊임없이 등장한다.
- 인형과 배우는 서로를 껴안고, 포개지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시노그래피 핵심:
- 종이 인형 → 기억의 조각, 휘발성과 상처
- 겹쳐진 몸 → 과거와 현재의 중첩
- 하얀 공간 → 망각의 무대, 침묵의 공간
이 공연을 보는 관객은 종종 개인적인 기억이나 부모, 아동기 트라우마와 연결되며, 울음을 터뜨린다.
+《Voyageur immobile》-움직이지 않는 자의 여정
"몸은 정지해 있으나, 정신은 끊임없이 떠돈다."
《Voyageur immobile》은 장티 특유의 이동과 고정의 역설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배우는 거의 무대 중앙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 주위를 모든 무대 요소가 회전하고 부유하며 감정의 공간을 만든다.
- 배우는 의자에 앉은 채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무대 전체가 천으로 물결치며 주변을 휘감는다.
- 과거의 인형, 그림자, 천 조각들이 주위를 맴돌며 배우의 내면을 시각화한다.
- 종종 배우의 과거 자아가 등장해 배우와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거나 서로 마주선다.
+ 시노그래피 핵심:
- 고정된 인물 + 움직이는 세계 → 심리적 여행 구조
- 회전 무대 → 시간의 순환, 기억의 반복
- 멀티 캐스팅 → 하나의 자아를 다양한 시점으로 연기
이 작품은 장티의 철학을 압축한다.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감정의 이동이다."
+ 세 작품에 흐르는 공통된 정서 구조
정서적 요소《Dérives》《Ne m’oublie pas》《Voyageur immobile》
주제 | 기억의 표류 | 망각과 기억의 투쟁 | 내면 여행 |
중심 오브제 | 천, 벽 | 종이, 인형 | 천, 그림자, 인형 |
무대 감성 | 몽환적, 고요 | 애잔함, 포근함 | 철학적, 정적 |
배우의 움직임 | 떠도는 유령 | 겹치는 그림자 | 정지와 대비 |
이 정서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줄거리가 아닌 ‘정서의 곡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결국, 장티의 작품은 내러티브보다 감정 구조를 통해 관객의 기억을 흔든다.
+ 인형과 인간의 경계 실험
세 작품 모두에서 인형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다. 인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 배우와 같은 크기의 인형이 등장해 배우와 동일한 동작을 반복함
- 인형의 몸에 배우가 들어가 감정을 표현함
- 인형과 배우가 번갈아 등장해 같은 역할을 수행함
이러한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진짜'와 '가짜', '살아 있는 것'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서 정체성, 자아, 감정의 해체와 재구성을 경험하게 만든다.
+ 장면과 조명 - 감정의 파편 만들기
장티의 무대 조명은 장면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조각을 형성하는 도구이다. 예를 들어,
- 《Dérives》의 무대는 어두운 바다처럼 흔들리는 조명 속에서 진행되며, 배우의 고독을 강화시킨다.
- 《Ne m’oublie pas》에서는 흰 조명 아래에서 종이 인형이 찢어질 때, 그 찰나의 순간이 빛에 의해 절정으로 포착된다.
- 《Voyageur immobile》에서는 주변의 빛이 점차 약해지며, 정지된 배우의 내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조명은 장면의 구획이 아니라, 기억의 스냅샷으로 작동한다.
+ 기억의 연극, 무의식의 무대
이 세 작품은 모두 무의식과 연결된 감정의 지층들을 무대화한다. 장티는 정신분석적 구조보다는 이미지적 구조를 선택하며, 관객에게 **“자신의 감정을 해석하게 하는 무대”**를 제공한다.
- 기억은 물리적 공간으로 투영된다.
- 자아는 배우, 인형, 그림자로 분열된다.
- 관객은 그 안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투사한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 시노그래피 이론에서 말하는 ‘심리 시노그래피(psychoscenography)’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 공연 후, 침묵 속의 울림
장티의 공연은 종종 정적 속에 끝난다. 커튼콜도 짧고, 조용하다. 그러나 객석에는 울먹이는 사람들, 침묵한 채 천천히 일어나는 관객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의 잔향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바로 장티식 무대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자, 대표작들이 남긴 유산이다.
+ 정리하며 -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이다
필립 장티의 대표작은 '기억의 극장'이다. 대사 없는 배우, 감정의 사물들, 흐르는 천과 종이 인형, 꿈같은 무대 구조는 관객의 내면에 말을 건다.
그는 줄거리를 없앰으로써, 관객에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기회를 준다. 그는 해설을 제거함으로써, 각자의 해석이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장티는 말한다:
“나는 무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을 꺼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우리의 기억과 조우하며 하나의 극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