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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권력/초인형

꿈을 조각하는 마법사,필립 장티-1, 말 없는 연극의 시작

by 스티븐C의 VIBES 2025. 5. 31.

 

오늘부터 5편에 걸쳐 **프랑스 연출가 필립 장티(Philippe Genty, 1938– )**의 삶과 무대 작업을 조망한다. 그는 한마디로, 오브제를 이용하여 무대를 꿈으로 바꾼 사람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서울, 대구, 아르코예술극장 등에서 공연을 올렸고, 독창적인 그의 이미지 연극은 국내 관객에게도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말 없는 무대, 움직이는 그림, 환상의 공간. 장티의 공연을 본 이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건 연극이라기보다,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의 무대는 대사보다 몸의 기억, 스토리보다 이미지의 떨림을 더 신뢰한다. 마리오네트, 오브제, 신체, 영상, 망각의 틈에서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이 무대 위에 하나의 시적 구조로 얽힌다. 장티는 평생 이렇게 믿어왔다. “연극이란 결국 인간 내부의 풍경을 꺼내 보여주는 것.” 그는 극의 흐름보다 장면의 감각, 캐릭터보다 존재의 조형을 통해 관객에게 ‘보는 것이 곧 느끼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왔다.

이 연재는 단순한 작가 소개가 아니다. 장티의 무대를 통해 묻는다. 무대란 무엇인가. 이미지는 어떻게 감정을 건드리는가. 그는 무대를 하나의 **‘움직이는 기억 장치’**로 바꾸었고, 공연예술의 언어를 다시 써 내려간 창조자였다. 지금부터, 그 여정의 문을 연다.

Compagnie Philippe Genty at the Queen Elizabeth Hall last night. I'd heard good things about the company but it was a big disappointment. It was like a dance piece with all the dance removed. One really beautiful image after another but with no narrative or emotion. Big, impressive, complex staging but only a few brief moments caught my interest.
La Fin des Terres,2007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philgyford/364440303

🎩 필립 장티의 생애와 예술적 여정-1

– 시노그래퍼이자, 인형의 연금술사


+ 꿈꾸는 아이, 파리에서 태어나다 (1938~1950년대)

1938년 프랑스 파리. 전후의 어수선한 사회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 속에서 필립 장티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말보다 이미지에 더 반응했고, 설명보다 분위기에 더 민감했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 파리 골목의 곡예사, 거리의 포스터와 서커스 간판들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장티는 자주 "그림이 내게 말을 걸었다"고 회상한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의 무대가 말보다 더 깊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는 미술학교에 진학해 그래픽 디자이너로 첫 경력을 시작했으나, 점차 '정지된 이미지'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지가 움직이고, 확장되고, 다른 감각들과 결합되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장티는 더는 정지된 캔버스 위에 머물 수 없었고, 무대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 세계를 향한 방랑, 인형을 만나다 (1960년대)

1962년, 그는 프랑스의 안락한 그래픽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전 세계를 여행한다. 이유는 단 하나, 인형극이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북유럽의 마리오네트, 인도의 카타쿨리, 인도네시아의 와양 클리틱, 일본의 분라쿠, 아프리카 부족 의례극 등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는 문화마다 인형의 형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인형은 인간보다 더 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말하지 않는 존재, 그러나 존재 이상의 감정을 품은 대상. 그는 이것이 자신의 예술적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이 여행은 단순한 견문이 아닌, 예술 언어의 전환이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연극에서 벗어나, 인형과 오브제, 무대 공간 자체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시노그래피를 구상하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6VVvVHUvBg

PHILIPPE GENTY / Désirs parade / extact 5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g6VVvVHUvBg

+ 극단 설립과 초기 실험 (1970년대)

1968년, 그는 드디어 자신의 극단 Compagnie Philippe Genty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소규모 인형극으로 시작했지만, 곧 배우와 인형, 오브제, 빛, 음악, 공간이 동등한 주체로 등장하는 형식을 실험한다.

초기 대표작인 《La Parade des Enfants》에서는 어린 시절의 꿈, 상처, 기억을 인형과 배우의 복합 움직임으로 재현했다. 무대 위 인형은 놀랍도록 생동감 있었고, 배우는 인형처럼 움직였다. 관객은 어떤 존재가 더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고, 그것이 바로 장티가 의도한 "경계의 붕괴"였다. La Parade des Enfants는 필립 장티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거대한 인형, 행진(퍼레이드) 형식, 몽환적 분위기, 초현실적 조형감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작업은 그의 후속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어휘, 즉 천, 종이, 그림자, 거울, 반복된 몸짓, 천천히 회전하는 무대 등으로 정착된다.


+ 언어 없는 연극의 시도

장티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아니,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말 대신 이미지, 몸짓, 사물, 공간의 리듬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접근은 서사 중심의 서구 연극 전통을 벗어난 것이었고, 초기에 평단에서는 당혹스러운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그의 무대를 본 이들은 점차 '말을 하지 않는데도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워했다.

그의 무대는 꿈처럼 펼쳐졌고, 장면과 장면은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감정의 흐름으로 연결되었다.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듯, 상처가 문득 스며들 듯이.


+ 메리 언더우드와의 협업 – 몸과 리듬의 발견

"Voyageur Immobile", 1994 et sa recréation "Voyageurs Immobiles", 2009. [출처]https://www.facebook.com/CompagniePhilippeGenty

1980년대, 장티는 안무가 **메리 언더우드(Mary Underwood)**를 만나며 자신의 작업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그녀는 무용과 신체 훈련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안무가로, 장티의 무대를 더욱 정교하고 리드미컬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함께 새로운 창작 방식을 개발했다. 먼저 이미지를 하나 떠올리고, 배우가 그것을 몸으로 표현한 뒤, 그것이 무대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를 다시 조합했다.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감정, 기억, 상상이 순차적으로 무대화되었다.

이 협업을 통해 탄생한 《Dérives》, 《Ne m’oublie pas》, 《Voyageur immobile》 같은 작품들은 '움직이는 시' 혹은 '기억의 환상극'이라 불리게 된다.


+ 배우 훈련, 그리고 '몸의 극장'

장티는 배우를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감정의 운반체로 보았다. 그의 워크숍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졌다:

  • 기억에서 출발: 배우는 자신의 내면에서 인상적인 감정을 꺼냄
  • 몸의 즉흥: 그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
  • 오브제와의 상호작용: 천, 종이, 인형 등과 함께 감정 표현을 확장
  • 리듬 구조화: 메리 언더우드가 움직임의 패턴을 안무화

이러한 훈련 방식은 현대 신체극, 시각극, 움직임 기반 연극 교육의 선례가 되었다.


+ 무대는 기억의 지형이다

Dérives
(1989-1993)
1989
"The first seventeen-scene play, on a single big stage. By re-reading my notes from the time, I can't see anything on the stage area and yet, with Dérives, systems are intuitively created, with a search for a new link between the spectator's imagination and what we show him...

Dérives is a dive into the world of a character searching for his identity, in a town full of chasms, exacerbated by the characters' constant change in scale...

In Dérives, a man wearing a grey raincoat and bowler hat splits in two simply by doing a pirouette, then changes into three identically clothed individuals, who start a disturbing choreography, which is half-dream and half-nightmare.

I once again opt for a silent play, which brings us back to a conscious style. Kathy Deville and Christian Carrignon of the Theatre de Cuisine become our partners alongside Pascale Blaison, who cut her teeth with the ostriches; Gabriel Guimard, an actor and clown discovered on a course in Peru; and Éric de Sarria. He was the first of my contributors to really come from text-based theatre. We saw him playing the brother of the Brontë sisters under Vicky Messica at the Déchargeurs theatre, and his presence immediately intrigued me... Initially very sceptical about our methods, little by little, he was to become one of the company's most loyal members. An ardent and passionate team, constantly on the edge, testing new things and experimenting new approaches.
The rehearsals for Dérives last a whole year..."
Dérives (1989-1993),"Désirs parade" directed by Philippe Genty. 1986. [출처]:https://philippegenty.com/en/compagnie/historique-derives.html

장티의 무대는 항상 꿈, 기억, 무의식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항상 , 종이, , 움직이는 벽, 조작되는 인형이라는 상징적 재료들로 구현된다.

Dérives》에서는 천이 거대한 파도처럼 배우를 감싸며 과거로 끌고 가고, 《Ne m’oublie pas》에서는 배우가 종이로 된 인형 안에 갇혀 있다가 찢고 나오는 순간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다.

그는 물질로 감정을 만들었고, 공간으로 기억을 설계했다. 장티의 무대는 관객의 무의식을 흔들고, 오래된 감정을 꺼내어 놓는 기억의 지형학이다.


+ 그의 무대는 계속 흐르고 있다

오늘날 필립 장티는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자신의 미학을 전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이미지로 말하는 예술'이 더 많은 이들에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의 자서전 『Paysages Intérieurs』(내면의 풍경들)는 단지 회고록이 아니라, 무대와 기억이 만나는 철학적 산문집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남기고 싶은 건 하나의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가 관객 안에서 오래 살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의 무대는 끝나도, 그 이미지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관객의 감정 안에서, 기억 속에서, 천천히 다시 살아난다.